날씨가 빚어내는 빈티지의 미학

“비·서리·우박 싫고 햇빛이 좋아”

On June 1, 2018


vineyard/ <AP>


가까운 친지 한 사람은 와인 병을 새로 오픈할 때마다 꼭 “이거 몇 년산이냐?”고 묻는다. 오래된 와인이 좋다는 고정관념이 박혀있어서 품종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묻는 것이다. “빈티지는 무조건 오래됐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고 와인마다 다르다”고 매번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다음에 묻는 말은 “이거 얼마짜리냐?”는 것이다. 가격과 상관없이 맛을 즐겨보라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가격을 알아야 맛을 느낀다는 것이다.
 
대단히 용감하게 무식하고 솔직한 이 사람은 나와 한집에 살면서 와인을 자주 나눠 마시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와인 칼럼을 쓰는 사람의 가족이라고 해서 와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위로받기 바란다.
 
빈티지(vintage)는 포도를 수확한 해를 말한다. 와인 생산년도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확히는 포도 수확년도를 빈티지라고 한다. 포도 재배기간은 북반구(유럽과 미국)는 4~10월이고, 남반구(호주, 칠레, 아르헨티나, 남아공 등)는 거꾸로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두해를 걸치므로 남반구에선 수확한 이듬해가 빈티지로 기록된다.
 

빈티지가 중요한 이유는 그해 날씨에 따라 와인 맛과 수확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포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조량이다. 햇빛을 많이 받아야 열매가 잘 익고 당분이 충분히 오른다. 흐리고 서늘한 날이 많은 해에는 포도가 더디 익고 당도가 낮아 좋은 맛을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더운 날만 계속되면 포도가 익기도 전에 건포도화되는 등 한해 날씨에 따라 당도와 산도의 형성이 달라져서 와인 맛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봄에 싹틀 무렵 서리가 내리거나, 꽃이 피기 시작할 때 우박이 쏟아지면 아예 열매 자체를 맺지 못하게 되어 한해 농사를 망치게 된다. 또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포도에 곰팡이가 피게 되고, 수확기에 비가 오면 포도에 물이 들어 결정적으로 맛을 버리게 된다.
 
좋은 빈티지와 나쁜 빈티지는 이런 한해 포도농사의 결과를 보고 결정된다. 해마다 로버트 파커 등 많은 와인 평가기관들이 빈티지 성적도 점수로 매기고 있으며, 지난 수십년간의 점수가 기록된 빈티지 차트(vintage chart)는 누구나 웹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날씨는 매년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기 때문에 빈티지 차트는 세계 와인산지를 50여개로 쪼개어 각각 점수를 매기고 있다. 보르도의 작황이 뛰어났던 여름에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는 나빴을 수도 있고, 같은 지역에서도 카버네 소비뇽 같은 적포도 품종은 잘 됐지만 샤도네 같은 화이트와인 품종은 어려웠던 해도 흔히 있을 정도로 빈티지의 곡선은 변화무쌍하다.
 

빈티지의 영향이 큰 곳은 날씨 변덕이 심한 구세계 와인산지들이다. 프랑스(보르도, 부르고뉴, 샹파뉴), 이탈리아 북부(피에몬테, 베네토, 롬바르디), 스페인 북부(리오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와인들은 빈티지에 따라 맛과 가격이 크게 차이난다. 장기저장을 위해 와인을 구입한다면 당연히 좋은 빈티지를 찾아야한다.

한편 날씨 변화가 극심하지 않은 신세계 와인들은 빈티지의 영향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호주, 캘리포니아, 아르헨티나가 그렇고, 유럽에서도 스페인 중부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는 연중 해가 많이 나고 기후변화가 크지 않아 일관성 있는 와인을 만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테크놀러지 도입과 양조기술의 발전은 나쁜 작황의 피해도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와인 맛을 아는 사람은 지역에 상관없이 빈티지의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빈티지가 없는 넌빈티지(Non vintage) 와인도 있다. 언제나 맛을 균일하게 맞추기 위해 여러 해의 포도를 섞어서 만드는 샴페인(스파클링 와인)이나 테이블와인이 대표적으로, 보통 NV로 표시하거나 아무 년도를 쓰지 않는다.

참고로 지난 10여년간 주요 레드와인 산지의 좋았던 해와 나빴던 해는 다음과 같다.




 
글 :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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