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터레이 와인 컨트리 5 에필로그

겉치레 없이 편안한 와인 산지

조용한 분위기 캐주얼한 시음

On September 28, 2018



‘한 패밀리’ 비녀드에서 익어가는 포도


와인 여행이란게 떠날 때는 너무나 즐겁고 흥분되지만, 돌아올 때면 허탈감에 빠지면서 인생을 비관까지 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맛있는 와인들 실컷 맛보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짬짬이 쇼핑도 하다가 LA를 향해 차머리를 돌리고 나면 이제 마법과 환상은 깨지고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할 생각에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다. 열두시 땡 쳤을 때의 신데렐라가 동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와이너리 트립을 다녔지만 이번에 처음 가본 몬터레이는 많이 달랐다. 다녀와서도 자꾸 생각이 나고 곧바로 다시 가고 싶은 느낌,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일단 (아직은) 겉치레가 없다는 점이 좋았던 거 같다. 테이스팅 룸의 분위기도, 사람들도 소박하고 가식이 없었다.

그러니 와인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고 쓸데없는 데 정신을 팔거나 주눅들 일이 없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서버들은 성의있고 진지했으며, 와인 판매나 와인 클럽 가입을 권유하는 부담도 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와인을 모두 잘 만들고, 아주 깨끗하게 맛있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유명한 와인산지들인 나파 밸리, 소노마 카운티, 파소 로블스, 산타 바바라는 이제 더 이상 옛날처럼 마음 편히 와인 즐기러 훌쩍 떠날 수 있는 곳들이 아니다. 와인 시음료, 레스토랑, 숙박시설이 모두 호화롭게 업그레이드 돼서 비용도 많이 들뿐더러 웬만한 와이너리는 시음 예약을 요구하기 때문에 미리 스케줄을 다 만들어서 가야한다는 부담이 있다. 

게다가 대단하게 화려한 테이스팅 룸에서 대단하게 바람이 든 서버들이 잘난 체를 하면서 와인을 쥐꼬리만큼 따라주고, 시음료는 보통 기본이 30~50달러에서 한없이 올라가며, 기프트 숍에는 눈을 현혹하는 물건들을 잔뜩 진열해놓아 취기 오른 방문자의 판단력을 흐리기 십상이다. 그러고도 와인이 맛이 없으면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런 사치에 빠지는 즐거움도 필요하고, 그랬던 시절도 있다. 하지만 와인에만 집중하고 싶을 때는 모두 겉치레에 불과해서 차라리 포도원 옆의 허름한 거라지에서 흙냄새 맡으며 테이스팅 하는 곳은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오래전 나파 밸리의 ‘부엘러’(Buehler), 파소 로블스의 ‘다크 스타’(Dark Star), 산타 바바라의 ‘팍슨’(Foxen)이 그랬듯이…

산타 루치아 하일랜즈(SLH)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20~30분 정도 들어가면 SLH 산 북쪽에 위치한 카멜 밸리가 나온다. 이곳에는 굉장히 많은 포도원이 있지만 테이스팅 룸을 갖춘 와이너리는 30여개에 지나지 않고, 그 중에서도 질 좋은 와인으로 알려진 곳은 대부분 리버 로드(River Road) 길을 따라 10여개가 몰려있다.

나머지 와이너리들은 대부분 포도원을 개방하지 않고 카멜 바이더 시와 카멜 밸리 빌리지에 테이스팅 룸을 열고 있는데 시음료는 대부분 15~20달러, 예약이 필요 없고 언제나 한산한 분위기에서 캐주얼한 시음이 가능하다.

떠나오던 날 예정에 없이 카멜 밸리의 ‘한 패밀리’(Hahn Family)와 ‘래스’(Wrath)에 들러서 시음했다. ‘한 패밀리’는 규모가 상당히 큰 이 지역의 대표적 와이너리의 하나이고, ‘래스’는 이곳 출신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이름을 따온 곳인데, 두 군데 모두 무척 좋았다. 



 ‘래스’의 엑스 돌리오 팔랑기나


특히 ‘래스’에서 엑스 돌리오 팔랑기나(Ex Dolio Falanghina·29달러)라는 와인을 시음한 것이 흥미로웠다. 이것은 고대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에서 와인을 만들던 방식으로 껍질째 토기에서 발효시키고 숙성시킨 후 필터링과 파이닝을 하지 않아서 약간 불투명한데 복숭아 맛이 확 나면서 어찌나 경쾌하고 새콤하던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글 :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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